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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윤흥신 순절비문(尹興信 殉節碑文)

물텀벙 2015. 3. 14. 11:07

40. 윤흥신 순절비문(尹興信 殉節碑文)

 

 

 

윤흥신(尹興信)은 찬성(贊成)을 지낸 윤임(尹任)의 아들로,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 다대포 첨사(多大浦僉使)로 있으면서 왜적을 맞아 홀로 진(鎭)을 지키다가 순절(殉節)하였다.
비문에는 윤흥신이 순절할 때 서제(庶弟)인 윤흥제(尹興悌)가 그를 끌어안고 함께 죽었는데, 끌어안은 것을 끝내 풀지 못하여 같은 관(棺)에 넣어서 장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윤흥신의 일은 오래도록 알려지지 않아 뒤늦게야 송상현(宋象賢)과 정발(鄭撥)을 배향(配享)했던 충렬사(忠烈祠)에 아울러 배향되었고, 비석은 그보다도 뒤인 1841년(헌종 7년)에 동래부사(東萊府使) 홍종응(洪鍾應)에 의해서 세워졌다.

비문은 조진관(趙鎭寬)이 지었다.

※ 조진관(趙鎭寬) 1739(영조15)∼1808(순조8) 문신으로 자는 유숙, 호는 가정(柯汀), 본관은 풍양(豊壤), 제학(提學), 광주부윤(廣州府尹)을 지냈다.

 

 

 

僉使尹公興信殉節碑

昔在龍蛇之變東萊首嬰其鋒▨東萊鎮守之臣十數其殉節○者地主宋象賢釜山鄭撥多大浦則尹公興信是爲東萊▨▨臣府人立忠烈祀宋鄭两公公則○于家始倭陷釜山分兵圍多大公力却之軍吏進曰賊必悉至莫如避公叱曰有死而已日賊大集軍遂潰公獨終日射賊城陷死之其後八谷具公思孟為吊亾錄紀其事甚備云公贊▨任之子兄弟六▨其三人者興扵乙巳之禍其赴鎮也有庶弟興悌從焉及賊逼公白刃亂下興悌抱公同死握固終不釋遂同棺而窆何其竒且烈也後百有餘年我先大夫守萊府繼泛東槎知公事甚熟愍其闕扵宋鄭之祠白于 朝乆之事竟施李侯海文槎上客也及莅此鎭先大夫記分蹟與之旣揭壁又將竪碑회海文去官其後守鎮者皆俗吏不▨語此事不侫甞訪李侯之石而鎮人無知者懼斯役之不成作此文竢去慕義如李侯者云
輔國崇祿大夫判敦寧府事兼吏曹判書判義禁府事知 經筵春秋館事趙鎭寬撰
鍾應出守萇山今相國雲石趙公贈之以言曰萊府有忠烈祠舊享宋鄭两臣其竝腏尹公自吾先大父始先君子實紀其事措貞珉之刻尙此闕焉子其為我圖之及莅是地感念遺蹟亟伐石以竪噫修墜典補軼事盖雲石所以克齊先志閳忠表節亦守臣責遂▨與之成
崇禎紀元後四辛丑 四月 日 知府洪鍾應書

 

 

 

윤흥신순절비

첨사(僉使) 윤공 흥신(尹公興信) 순절비(殉節碑)

옛날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있었을 때에 동래(東萊)가 가장 먼저 그 칼날을 받았으므로 동래를 둘러싼 진(鎭)의 수신(守臣) 십여 명이 순절(殉節)하였다. 그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사람은 동래 부사(東萊府使)였던 송상현(宋象賢)과 부산(釜山)의 정발(鄭撥)이었고, 다대포(多大浦)에는 윤공흥신(尹公興信)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당시에 동래 첨사(僉使)였다.
동래부(東萊府)의 사람들이 충렬사(忠烈祠)를 세워 송상현과 정발, 두 분을 배향(配享)하였으나 공(公)은 그 집안에만 정려(旌閭)하였다. 처음에 왜적(倭賊)이 부산을 함락하고서 군대를 나누어 다대포를 포위하였다. 그때 공이 힘써 왜적을 물리쳤는데, 군리(軍吏 : 군대에 딸린 문관)가 나아와서 아뢰기를, “왜적이 반드시 다시 쳐들어 올 것이니 피하는 것보다 나은 계책(計策)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공이 꾸짖어 말하기를,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다음날 왜적이 대대적으로 쳐들어오자 군병(軍兵)을 소집하였으나 마침내 대열(隊列)을 무너뜨리고 흩어져버렸다. 공은 홀로 종일토록 왜적을 향해 화살을 쏘았지만 성(城)이 함락되어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 뒤에 팔곡(八谷) 구공사맹(具公思孟)이 ‘조망록(弔亡錄)’을 지어서 그때의 일을 기록하였는데 그때의 일이 아주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공은 찬성(贊成)을 지낸 윤임(尹任)의 아들이다. 형제가 여섯인데 그 중에서 세 사람이 을사년(인종 1, 1545년)에 화(禍)를 당했다. 공이 다대포진(多大浦鎭)에 달려갔을 때에 서제(庶弟)인 윤흥제(尹興悌)가 함께 따라갔는데 왜적이 공을 위협하여 시퍼런 칼날을 마구 휘두르자 윤흥제가 공을 끌어안고 함께 죽음을 당하였다. 끌어안은 것이 어찌나 견고하던지 끝내 풀 수가 없어서 마침내 함께 관(棺)에 넣어서 하관(下棺)하였으니, 어찌 그리도 기이하고 장렬(壯烈)한가.
백여 년이 지난 뒤에 우리 선대부(先大夫)께서 동래 부사가 되어 계속해서 일본(日本)에 통신사(通信使)로 가게 되었는데, 그는 공의 일을 매우 익숙하게 알고 있었으며 공이 송상현과 정발의 사당에서 빠져있는 것을 안타까워하였었다. 그래서 조정(朝廷)에 아뢰니 오래 지난 일이 마침내 시행되게 되었다. 그때 이후해문(李海文)이 통신사의 상객(上客)이었는데, 이 다대포진의 첨사(僉使)로 부임하게 되자 선대부께서 공의 사적(事蹟)을 기록하여 그에게 주었다. 이해문이 그것을 벽에 게시하고 또 비석을 세우려고 하였으나 때마침 이해문이 벼슬을 그만두게 되었다. 그 뒤에 다대포진에 부임한 자들은 모두가 견식(見識)이 없고 속된 관리였으므로 이 일을 말하기에 충분하지가 않았다. 그래서 재주 없는 내가 일찍이 이후(李侯)의 비석을 방문했다가 무지한 다대포진의 사람들이 이 역사(役事)를 이루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이 비문(碑文)을 지어서 충의를 사모하는 것이 이후 같은 자를 기다린다고 하였다.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판돈녕부사 겸 이조판서 판의금부사 지경연 춘추관사(判敦寧府事兼吏曹判書判義禁府事知經筵春秋館事) 조진관(趙鎭寬)은 비문을 짓다.

내가 장산(萇山)의 수령(守令)으로 나가게 되었을 때에 지금의 상국(相國)인 운석(雲石) 조공(趙公)이 나에게 일러 말하기를, “동래부에는 충렬사가 있다. 옛날에는 송상현과 정발, 두 신하만을 배향하다가 윤공(尹公)을 아울러 배향하게 되었는데, 우리 선대부(先大父)로부터 시작하여 선군자(先君子)께서 그 일을 사실대로 기록하였다. 그러나 비석이 아직까지도 이곳에서 빠져있는 것이 애석하다. 그래서 아들이 나를 위하여 그 일을 도모한다.”라고 하였다. 이 땅에 부임하게 되어 남은 자취를 보고 생각하는 바가 있어서 속히 돌을 깎아서 비석을 세웠다.
아! 쇠퇴해진 의식(儀式)을 고치고 기록에서 빠져 알려지지 않은 사실을 바로 잡은 것은 대체로 운석이 선대(先代)의 뜻을 이룬 것이요, 충절(忠節)을 드러내어 표창(表彰)하는 것 또한 수신(守臣)의 책무(責務)인 것이니, 마침내 기쁘게 그와 함께 이 일을 완성하였다.

숭정기원후 네 번째 신축년(헌종 7, 1841년) 4월 일에 동래 부사(東萊府使) 홍종응(洪鍾應)은 글을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