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조선국자헌대부의정부우참찬겸동지춘추관사오위도총부도총관 윤공 묘표
음기
고(故) 의정부우참찬 국간(菊磵) 윤공(尹公)께서 졸(卒)한 지가 이미 92년이 되었는데, 후사(後嗣)가 세 번 끊어지는
바람에 무덤에 비석이 없어서 윤공의 시종(始終)의 이력(履歷) 및 행실(行實)을 기억할 수가 없으니, 아, 슬프다. 공은 정덕(正德)
갑술년(1514, 중종 9) 5월 8일에 출생하였는데, 가정(嘉靖) 신묘년(1531, 중종 26)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고,
정유년(1537, 종종 32)에 대과(大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삼사(三司)의 관직에 출입하였으며,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가장 오래도록 하였다. 그 뒤에 광주목사(廣州牧使), 황해도(黃海道)·충청도(忠淸道)·경기도(京畿道)의 관찰사(觀察使),
형조(刑曹)·호조(戶曺)의 참판, 우참찬(右參贊), 호조판서(戶曹判書) 등을 역임하였다. 만력(萬曆) 무인년(1578, 선조 11) 7월 3일에
졸하였으니 누리신 수(壽)가 65세였으며, 강음현(江陰縣) 춘명산(春明山)에 있는 선영(先塋)의 묘좌유향(卯坐酉向)의 자리에 장례를 치렀다.
유고(遺稿)가 몇 권 남아 있다. 공은 재주가 정심(精深)하고 초매(超邁)하여 일찍부터 시(詩)에 능(能)하다는 명성을 떨쳤으니,
영주(瀛洲 : 호당(湖堂)에 오름)에 올랐을 때 시를 짓기만 하면 곧 세인(世人)들의 입에 회자(膾炙)되었다. 만년에 발탁되어 임용되었을 때는
사무의 처리로써 공적을 드러내었으니, 그가 호조의 직임에 있었을 적에 재용(財用)을 절약하면서 일을 정밀하게 처리하였는데, 정력(精力)을 쓴
정도가 다른 사람의 갑절이었다. 총괄하면서 변통하여 씀씀이를 절약하고 국고를 넉넉하게 하는 방도에는 교묘한 방법을 곡진(曲盡)하게 다 쓰지
않음이 없었으니, 세상 사람들이 조선의 개국 이래로 첫 번째 손꼽을 인물이라고 칭송하였다. 그가 평소에 하던 조처는 대부분 오늘에 이르기까지
모범이 되고 있으니, 이에 대해서는 실로 사관(史官)의 특별한 기록이 있다. 그러나 그 단서(端緖)와 의취(意趣)는 역시 호당문대(湖堂問對)와
영남탄(嶺南歎) 등의 저작에 대략 보인다. 이러한 까닭으로 선조(宣祖)께서 조정에 임하실 때마다 그의 재능에 대해 감탄하였으며, 나중에
인조(仁祖)와 효종(孝宗) 두 임금께서도 국가의 대계를 의논하게 되었을 때 혀를 끌끌 차면서 뒤미쳐 상찬(賞讚)하지 않은 적이 없었던 것이다.
아, 이에 공을 알 수 있다 하겠다. 무엇보다도 공은 시(詩)로써 명성을 떨쳤지만, 그러나 문사들에게 뽐내어 보이면서 스스로 재주
드러내기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또한 세속적인 벼슬아치의 혁혁한 명성을 구하지도 않았다. 대개 조정에 선 후 40여년 동안에 세도(世道)의
소장성쇠(消長盛衰)가 없지 않은 부분이 없었지만, 공은 또한 처신하기를 편안한 듯이 하였다. 조용하고 겸손하고 신중한 성품을 가졌는데다가
꾸밈없는 소박한 태도와 재능을 감추는 자세를 지님으로써 시종(始終)토록 온전히 잘 보존하였으니, 거기에는 틀림없이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모두 자세히 알 수가 없으니, 혹시 ‘쓸모없는 나무와 잘 우는 거위[木雁]’의 설(說)로써 자신을 드러낸다고 한 것이 그
처세법이었을까. 아, 공은 이름이 현(鉉)이고 자(字)가 자용(子用)이니, 파평(坡平)을 본관(本貫)으로 삼은 큰 성씨요, 고려의
태사(太師) 신달(莘達)의 후예(後裔)이다. 이름이 관(瓘)이라는 분은 여러 번 여진(女眞)을 평정하여 큰 공훈을 세웠으니, 시호가
문숙공(文肅公)이다. 그로부터 12세(世)에 이르러 경(坰)이라는 분은 배천군수(白川郡守)를 지냈는데, 이 분이 공의
고조(高祖)이다. 당초 배천 군수공에게 아들 넷이 있었으니, 첫째아들이 보상(輔商)으로, 부사(府使)를 지냈으며, 영(英)을 낳았고,
영은 학령(鶴齡)을 낳았는데, 영과 학령은 2세가 나란히 별좌(別坐)를 지냈다. 셋째아들이 필상(弼商)으로, 우리 세조(世祖)를 보좌하여
혹 장수가 되기도 하고 혹 재상이 되기도 하였으니, 훈명(勳名)이 성대하였다. 이 분이 참의(參議)를 지낸 간(侃)을 낳았고, 참의공 간이
돈녕부정(敦寧府正)을 지낸 승홍(承弘)을 낳았다. 이에 공이 돈녕부정 공의 둘째 아들로서 별좌 휘 학령의 후사(後嗣)를 이었다. 공은
전주이씨(全州李氏)를 아내로 맞았으니, 부사(府使) 이경충(李景忠)의 따님인데, 자식을 보지 못하였다. 두 번째로 합천이씨(陜川李氏)를 아내로
맞았으니, 부사 이세구(李世球)의 따님인데, 딸 둘을 낳았다. 큰딸은 군수 박린(朴璘)에게 출가하여 군수를 지낸 아들 응선(應善)을 낳았고,
둘째딸은 참판 이정형(李廷馨)에게 출가하여 아들 셋을 낳았으니, 봉사(奉事)를 지낸 율(溧), 참봉을 지낸 국(氵+國), 찰방을 지낸 숙(潚),
별좌를 지낸 혁(氵+奕)이다. 세 번째로 전주이씨(全州李氏)를 아내로 맞았으니, 현감 이원우(李元友)의 따님으로, 2남 2녀를 두었다. 장남은
지성(知性)으로, 성품이 총민(聰敏)하였는데, 남원김씨(南原金氏)를 아내로 맞이하고 일찍 죽었다. 차남은 문성(聞性)으로, 부원군(府院君)
윤근수(尹根壽)의 따님을 아내로 맞았으나 자식을 보지 못하였으므로, 종질(從姪) 서(漵)를 데려다가 후사로 삼았다. 장녀는 군수
남이성(南以聖)에게 출가하였는데, 종자(從子) 두화(斗華)를 데려다가 후사로 삼았다. 차녀는 좌랑(佐郞) 송구(宋耈)에게 출가하였는데,
지사(知事) 조위한(趙緯韓)에게 출가한 딸 하나를 두었다. 공의 세 부인에 대한 봉작(封爵)과 추증(追贈)은 모두 공의 관작(官爵)에 견주어
제수되었다. 그 뒤 서(漵)에게 후사가 없었으므로, 족질(族姪) 광은(光殷)을 데려다가 후사로 삼았는데, 그도 또한 후사가 없이
졸하였으며, 유학(幼學) 유기증(兪企曾)에게 출가한 딸 하나를 두었다. 외손과 증현손(曾玄孫)을 합하여 모두 70여 인이나 된다. 이들이
마침내 재물을 모으고 돌을 다듬어서 후일 비석으로 사용할 계책을 세웠으니, 참으로 이러한 일은 지하에 계시는 공의 마음을 위로하기에는 조금이나마
충분하다 하겠다. 이에 음기(陰記)를 쓰는 바이다.
가정(嘉靖)32년 계축년(1553, 명종 8) 3월 일, 외현손(外玄孫)
유▨(兪▨) 세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