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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윤현 묘표문(尹鉉 墓表文)

물텀벙 2015. 3. 18. 04:54

35. 윤현 묘표문(尹鉉 墓表文)

 

 

 

1553년(명종 8)에 세워진 윤현(尹鉉)의 묘표(墓表)이다. 찬자는 윤현의 외현손인 이유(李兪)이다.
윤현(1514~1578)의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자용(子用), 호는 국간(菊磵),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좌의정 필상(弼商)의 증손이며, 승홍(承弘)의 아들이다. 1531년(중종 26)에 진사가 되고, 1537년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이듬해 정언이 되고 수찬, 교리 등을 역임한 뒤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1550년 장악원정으로 "중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어 광주목사(廣州牧使), 황해도·충청도·경기도 관찰사를 거쳐, 형조참판, 호조참판, 우참찬, 호조판서 등 중앙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572년(선조 5)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지돈령부사에 임명되었다. 시문에 능하였으며, 그가 노년에 이르도록 관직에 있었던 것은 탁월한 행정수완 때문이었다. 특히 호조에서 근무할 때는 국가재정을 아끼고, 한편으로는 재정을 유족하게 만들어 국조 이래 제1인자로 칭송되었다. 명종 때에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저서로는 『국간집(菊磵集)』이 있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비문에 따르면 윤현이 죽은 지 이미 92년이 되었는데, 후사(後嗣)가 세 번 끊어지는 바람에 무덤에 비석이 없어서 윤현의 시종(始終)의 이력(履歷) 및 행실(行實)을 기억할 수가 없다. 윤현은 詩로 명성을 떨쳤지만, 겸손하여 스스로 재주 드러내기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또한 세속적인 벼슬아치의 혁혁한 명성을 구하지도 않았다. 조용하고 겸손하고 신중한 성품을 가지고, 꾸밈없는 소박한 태도와 재능을 감추는 자세를 지님으로써 시종토록 온전히 잘 보존하였다.
그의 후손은 외손과 증현손을 합하여 모두 70여 인이나 되는데, 이들이 모여서 윤현의 비석을 세웠다

 

 

 

有明朝鮮國資憲大夫議政府右參贊兼同知春秋館事五衛都摠府都摠管尹公墓表陰記


故議政府右參贊菊磵尹公卒已九十二年而後嗣三絶墓無顯刻其始終履歷行實皆靡得而記焉嗚呼悲哉其可記者公生于正德甲戌五月八日以嘉靖辛卯中進士試丁酉魁大科未幾幷出入三司賜暇湖堂最久後歷廣州牧使黃海忠淸京畿諸道觀察使刑戶曹參判右參贊戶曹判書以萬曆戊寅七月初三日卒壽六十有五葬于江陰縣春明山先塋酉向之原有遺稿若干卷公才調精邁蚤擅能詩聲比登瀛其所諷詠輒爲人膾炙及晩歲進用率以吏治勞績其在地官勤儉詳密精力兼人所以綜理通變節用裕財者無不曲盡其妙世稱 國朝以來一人其平生規畫多至今以爲法固有太史氏特書然其端緖旨趣亦略見於湖堂問對嶺南歎等作是故宣廟臨朝每歎其能及後仁孝兩聖論國家大計未嘗不嘖嘖追賞嗚呼斯可以觀公矣最公以詩名而顧不爲文人夸詡自喜以才諝著而又不求俗吏赫赫聲蓋自立朝四十餘年其間世道消長無所不有而公且處之逌然恬靜謙愼素履藏用以善其始終是必有道矣然今皆不可▨▨▨則儻所謂以木雁自見者是耶噫公諱鉉字子用坡平大姓高麗大師莘達之後有諱瓘累平女眞有大功諡文肅公逮十二世而有諱坰白川郡守寔爲公高祖始白川公有四子伯曰輔商府使生諱英生諱鶴齡聯二世爲別坐叔曰弼商佐我 世祖或將或相勳名甚盛生諱侃參議生諱承弘敦寧府正於是公以正公仲子爲小別坐公後娶全州李氏府使景忠之女無育再娵陜川李氏府使世球之女有二女長適都事朴璘生一男應善郡守次適參判李廷馨生四男曰溧奉事曰漍參奉曰潚察訪曰湙別坐三娶全州李氏縣監元友之女有二男二女男長曰知性性聰敏娵南原金氏早圽次曰聞性娶府院君尹根壽女無子取從姪潊爲后女長適郡守南以聖取從子斗華爲后次適佐郞宋耇生一女適知事趙緯韓公之三夫人封 贈俱視公爵▨▨▨▨子取從姪光殷爲后卒亦以無嗣生一女適幼學兪企曾外裔曾玄總七十餘人遂相與鳩財治石▨...▨斯擧也差足以慰公泉下之思矣是爲記
嘉靖三十▨年癸丑三月 日 外玄孫兪▨立

 

 

 

유명조선국자헌대부의정부우참찬겸동지춘추관사오위도총부도총관 윤공 묘표 음기

고(故) 의정부우참찬 국간(菊磵) 윤공(尹公)께서 졸(卒)한 지가 이미 92년이 되었는데, 후사(後嗣)가 세 번 끊어지는 바람에 무덤에 비석이 없어서 윤공의 시종(始終)의 이력(履歷) 및 행실(行實)을 기억할 수가 없으니, 아, 슬프다.
공은 정덕(正德) 갑술년(1514, 중종 9) 5월 8일에 출생하였는데, 가정(嘉靖) 신묘년(1531, 중종 26)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고, 정유년(1537, 종종 32)에 대과(大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삼사(三司)의 관직에 출입하였으며,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가장 오래도록 하였다. 그 뒤에 광주목사(廣州牧使), 황해도(黃海道)·충청도(忠淸道)·경기도(京畿道)의 관찰사(觀察使), 형조(刑曹)·호조(戶曺)의 참판, 우참찬(右參贊), 호조판서(戶曹判書) 등을 역임하였다. 만력(萬曆) 무인년(1578, 선조 11) 7월 3일에 졸하였으니 누리신 수(壽)가 65세였으며, 강음현(江陰縣) 춘명산(春明山)에 있는 선영(先塋)의 묘좌유향(卯坐酉向)의 자리에 장례를 치렀다. 유고(遺稿)가 몇 권 남아 있다.
공은 재주가 정심(精深)하고 초매(超邁)하여 일찍부터 시(詩)에 능(能)하다는 명성을 떨쳤으니, 영주(瀛洲 : 호당(湖堂)에 오름)에 올랐을 때 시를 짓기만 하면 곧 세인(世人)들의 입에 회자(膾炙)되었다. 만년에 발탁되어 임용되었을 때는 사무의 처리로써 공적을 드러내었으니, 그가 호조의 직임에 있었을 적에 재용(財用)을 절약하면서 일을 정밀하게 처리하였는데, 정력(精力)을 쓴 정도가 다른 사람의 갑절이었다. 총괄하면서 변통하여 씀씀이를 절약하고 국고를 넉넉하게 하는 방도에는 교묘한 방법을 곡진(曲盡)하게 다 쓰지 않음이 없었으니, 세상 사람들이 조선의 개국 이래로 첫 번째 손꼽을 인물이라고 칭송하였다. 그가 평소에 하던 조처는 대부분 오늘에 이르기까지 모범이 되고 있으니, 이에 대해서는 실로 사관(史官)의 특별한 기록이 있다. 그러나 그 단서(端緖)와 의취(意趣)는 역시 호당문대(湖堂問對)와 영남탄(嶺南歎) 등의 저작에 대략 보인다. 이러한 까닭으로 선조(宣祖)께서 조정에 임하실 때마다 그의 재능에 대해 감탄하였으며, 나중에 인조(仁祖)와 효종(孝宗) 두 임금께서도 국가의 대계를 의논하게 되었을 때 혀를 끌끌 차면서 뒤미쳐 상찬(賞讚)하지 않은 적이 없었던 것이다. 아, 이에 공을 알 수 있다 하겠다.
무엇보다도 공은 시(詩)로써 명성을 떨쳤지만, 그러나 문사들에게 뽐내어 보이면서 스스로 재주 드러내기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또한 세속적인 벼슬아치의 혁혁한 명성을 구하지도 않았다. 대개 조정에 선 후 40여년 동안에 세도(世道)의 소장성쇠(消長盛衰)가 없지 않은 부분이 없었지만, 공은 또한 처신하기를 편안한 듯이 하였다. 조용하고 겸손하고 신중한 성품을 가졌는데다가 꾸밈없는 소박한 태도와 재능을 감추는 자세를 지님으로써 시종(始終)토록 온전히 잘 보존하였으니, 거기에는 틀림없이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모두 자세히 알 수가 없으니, 혹시 ‘쓸모없는 나무와 잘 우는 거위[木雁]’의 설(說)로써 자신을 드러낸다고 한 것이 그 처세법이었을까.
아, 공은 이름이 현(鉉)이고 자(字)가 자용(子用)이니, 파평(坡平)을 본관(本貫)으로 삼은 큰 성씨요, 고려의 태사(太師) 신달(莘達)의 후예(後裔)이다. 이름이 관(瓘)이라는 분은 여러 번 여진(女眞)을 평정하여 큰 공훈을 세웠으니, 시호가 문숙공(文肅公)이다. 그로부터 12세(世)에 이르러 경(坰)이라는 분은 배천군수(白川郡守)를 지냈는데, 이 분이 공의 고조(高祖)이다.
당초 배천 군수공에게 아들 넷이 있었으니, 첫째아들이 보상(輔商)으로, 부사(府使)를 지냈으며, 영(英)을 낳았고, 영은 학령(鶴齡)을 낳았는데, 영과 학령은 2세가 나란히 별좌(別坐)를 지냈다.
셋째아들이 필상(弼商)으로, 우리 세조(世祖)를 보좌하여 혹 장수가 되기도 하고 혹 재상이 되기도 하였으니, 훈명(勳名)이 성대하였다. 이 분이 참의(參議)를 지낸 간(侃)을 낳았고, 참의공 간이 돈녕부정(敦寧府正)을 지낸 승홍(承弘)을 낳았다. 이에 공이 돈녕부정 공의 둘째 아들로서 별좌 휘 학령의 후사(後嗣)를 이었다.
공은 전주이씨(全州李氏)를 아내로 맞았으니, 부사(府使) 이경충(李景忠)의 따님인데, 자식을 보지 못하였다. 두 번째로 합천이씨(陜川李氏)를 아내로 맞았으니, 부사 이세구(李世球)의 따님인데, 딸 둘을 낳았다. 큰딸은 군수 박린(朴璘)에게 출가하여 군수를 지낸 아들 응선(應善)을 낳았고, 둘째딸은 참판 이정형(李廷馨)에게 출가하여 아들 셋을 낳았으니, 봉사(奉事)를 지낸 율(溧), 참봉을 지낸 국(氵+國), 찰방을 지낸 숙(潚), 별좌를 지낸 혁(氵+奕)이다. 세 번째로 전주이씨(全州李氏)를 아내로 맞았으니, 현감 이원우(李元友)의 따님으로, 2남 2녀를 두었다. 장남은 지성(知性)으로, 성품이 총민(聰敏)하였는데, 남원김씨(南原金氏)를 아내로 맞이하고 일찍 죽었다. 차남은 문성(聞性)으로, 부원군(府院君) 윤근수(尹根壽)의 따님을 아내로 맞았으나 자식을 보지 못하였으므로, 종질(從姪) 서(漵)를 데려다가 후사로 삼았다. 장녀는 군수 남이성(南以聖)에게 출가하였는데, 종자(從子) 두화(斗華)를 데려다가 후사로 삼았다. 차녀는 좌랑(佐郞) 송구(宋耈)에게 출가하였는데, 지사(知事) 조위한(趙緯韓)에게 출가한 딸 하나를 두었다. 공의 세 부인에 대한 봉작(封爵)과 추증(追贈)은 모두 공의 관작(官爵)에 견주어 제수되었다.
그 뒤 서(漵)에게 후사가 없었으므로, 족질(族姪) 광은(光殷)을 데려다가 후사로 삼았는데, 그도 또한 후사가 없이 졸하였으며, 유학(幼學) 유기증(兪企曾)에게 출가한 딸 하나를 두었다.
외손과 증현손(曾玄孫)을 합하여 모두 70여 인이나 된다. 이들이 마침내 재물을 모으고 돌을 다듬어서 후일 비석으로 사용할 계책을 세웠으니, 참으로 이러한 일은 지하에 계시는 공의 마음을 위로하기에는 조금이나마 충분하다 하겠다.
이에 음기(陰記)를 쓰는 바이다.

가정(嘉靖)32년 계축년(1553, 명종 8) 3월 일, 외현손(外玄孫) 유▨(兪▨) 세움.